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前대법관 양창수 교수 특강
작성자 법학과 김윤지
날짜 2017.08.30
조회수 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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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4월 5일 수요일 오후 4시 30분에 법학관 319호에서 ‘BEST 법대교수 초청특강(민법)’을 주제로 양창수 교수(한양대 법학전문대학원, 前대법관)이 방문하였다.


그는 먼저 감사의 인사를 시작으로, 법 공부를 하며 느꼈던 의문, 소감, 질문에 대한 답변들을 솔직하게 거짓없이 말해주겠다 선언하였다.

보다 친근하게, 또 공부가 아니더라도 법과 관련되어 살아온 사람으로서 개인이나 일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바가 있으면 회고하고, 그것을 다시한번 새겨보겠다는 말을 하며 대학교에 입학하게 된 그의 청년시절부터 이야기를 진행하였다. 이야기는 그가 한국사를 좋아했던 것부터, 독어, 불어를 공부하던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갔다.


한국사에 대해 남다른 애정이 있었기 때문인지, 우리나라 법의 역사들도 한국사와 엮어 더욱 더 흥미롭고, 이해가 쉽도록 설명해주었다. “1845년 8월 9일을 기준으로 일본 민법의 친족상속 부분도 거의 그대로 시행이 되었다. 우리나라가 독립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 민법이 우리나라에 그대로 시행이 되었다는 것은 매우 부끄러운 상태가 일정기간 지속되었던 것이다.”라고 설명한 부분에서는 그의 애국심 또한 느낄 수 있었다. “ 그의 강의에 따르면 1945년 해방 이후, 1947년에 ‘법전기초위원회’가 만들어져서 민법, 형법, 상법, 형사소송법, 민사소송법’이 기초가 되어 작업이 한창 진행이 되었다. 그러나 그 작업을 하기위한 자료들과 입법을 할 수 있는 인적자원이 없었다. 또한 민법 관련하여 얘기하자면 전문 학교에 민법교수로 있었던 인물이 다섯명도 채 안됐었다. 민법을 새로 만드는데 결국은 ‘법전기초위원회’의 후신인 ‘법전편찬위원회’의 멤버인 주로 일제 때 실무를 보았던 인물들은 교수가 아니라 실제 판사, 변호사들이 기여하였다.” 라며 우리나라 법의 시초부터 다시 되짚었다.

질의응답 시간에는 “대법관이라는 지위가 마지막으로 결단을 내려야 하는 자리인데 그러한 자리가 부담스럽지 않았나?”라는 질문에 “수많은 사건들을 처리하였는데 그 자리에 앉아 있으면 정말 무겁고 괴롭다. 사람들이 대법원까지 오고 나면 더 이상 호소할 곳이 없기 때문이다. 막대한 양의 서면들을 그 사람들을 위해 다 읽어봐야 한다. 읽고 나면 어느 곳을 가도 머리 한 구석에 계속 남아 있다. 그 사람들에겐 그 서면들이 결정적으로 유, 무죄를 나누는 중요한 일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6년의 대법관 생활을 마치고 학교로 돌아오면서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었다. 법관은 사건 배당이 되어서 자신이 하기 싫은 일도 해야하지만, 교수는 하기 싫은 일을 안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대법관이라는 그 자리는 늘 나를 시험에 들게 하는 기분이 드는 자리였다.” 라고 아주 솔직한 답변을 해주었다.


양창수 교수는 ‘멸사봉공’과 ‘선공후사’ 이 두 말을 싫어한다 했다. 공적인 공동선의 추구는 사적인 것에 의해서 달성되어야 하는 것이지 자신을 죽이고 공을 추구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하였다. 이러한 의미에서 그는 법을 공부한 것을 절대 후회하지 않는다 하였다. 또한, 특강을 듣고 있는 학생들이 공부를 더 열심히 해서 우리나라를 더 발전된 나라로 만들어 줬으면 좋겠다며 소망을 내비쳤다. 이에 덧붙여, 여성의 지위도 좋아지고 있는 것은 분명하며, 학생 모두가 비로소 더욱 확실한 자기권리를 찾길 바란다고 당부의 말을 끝으로 강의를 마쳤다.


사진 : 강민아 기자 (charming9756@naver.com)
기사 : 오혜진 기자 (dh4175@naver.com)